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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계획이 있기 마련이다. 30㎞를 지나 다리가 무거워지기 전까지는. 체내에 축적됐던 에너지원 글리코겐이 바닥나는 이 구간이 마라톤의 진짜 시작이라고 한다. ‘벽을 만난다’거나 ‘다리가 잠긴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춘천마라톤 코스의 유명한 오르막 구간인 28㎞ 지점 서상대교~춘천댐에서 이미 조짐이 보였다. 오른쪽 종아리가 뻣뻣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근육 경련을 막아준다는 보충제를 꺼냈다. 원리가 궁금해서 챗GPT에 물어본 적이 있다. “입안의 감각 수용체를 강하게 자극해서 신경계에 신호를 보내고, 근육으로 향하는 과도한 수축 신호를 재조정한다”고 했다개원프
. 쉽게 말하면 강렬한 맛으로 신경계를 놀래서 쥐가 쏙 들어가게 해준다는 얘기다. 대회 당일에 새로운 시도를 하지 말라는 금언에 따라 연습 때 이미 먹어봤건만, 식초에 후추와 핫소스를 섞은 듯한 그 액체의 맛은 여전히 충격적이었다. 그 덕인지 그저 위약 효과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종아리가 뻐근하긴 해도 쥐는 나지 않았다.
32㎞쯤 왔을 땐 무주도주투자클럽
릎 바깥쪽 인대에 통증이 올라왔다. 고통스러운 것보다도 겁이 났다. 계속 아프면 걸어야 할 수도 있는데, 한 번 걷기 시작하면 다시 뛸 수 없을 것 같았다. “마라톤은 달리는 경기이지 걷는 경기가 아니다”라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떠올리며 계속 달렸다. 다행히 통증은 가라앉았다.
35㎞ 이후엔 정신력 싸움이었다. 어느 운동이든 온 힘흥아해운 주식
을 다하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마라톤처럼 사력을 다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자 끝인 종목이 또 있을까. 그만큼 골인하는 순간의 희열은 압도적이다. 엉엉 우는 사람이 많은 건 그 카타르시스 때문일 것이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지만, 역시 그래서 마라톤을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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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열린 2025 춘천마라톤 풀코스 참가자들이 7.5km 지점 신연교를 힘차게 달리고 있다. /고운호 기자
◇아쉽지만 후회는 없었던 레이스
지난달 26일 열린 춘천마라톤은 두 번째 풀코스였다. 첫 도전이었던 2023년 춘마 기록 3시간 14분 11초보IT관련주
다는 단축할 자신이 있었다. 6~9월에 매달 300㎞씩 달리며 더 많은 마일리지(누적 주행거리)를 쌓았다. 남산에서 오르막 훈련도 여러 차례 했다. 2년 전에는 풀코스 기록이 없어 출발 그룹 E조에 배정받았는데 올해는 B조로 올라왔다. 앞쪽에서 출발하면 인파에 가로막히지 않기 때문에 후미보다 유리하다.
훈련 분석 프로그램이 예측한 기록은 3시간 6분 33초였다. 1㎞당 4분 25초. 보통 425페이스라고 부른다. 이보다 10초 빠른 415를 목표로 잡았다. 아마추어 마라토너의 꿈인 서브스리(3시간 내 완주) 페이스다. 4월 서울하프마라톤 기록이 409페이스였으니 그간의 훈련을 믿고 도전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중반까지는 얼추 비슷한 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러나 마라톤은 무섭도록 정직한 운동이었다. 서상대교-춘천댐에서 434까지 떨어진 페이스를 420 안쪽으로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3시간대에서 분 단위가 한 자릿수인 싱글(3시간 9분 59초까지)은 되겠다 싶었지만, 안심하는 순간 싱글도 못 한다는 생각에 보스턴 마라톤 지원 자격이 주어지는 3시간 5분(40~44세 기준)으로 목표를 조정했다. 문턱 높은 보스턴 마라톤의 출전 자격자(Boston Qualifier)가 되는 것 역시 러너들에겐 하나의 징표 아니던가.
최종 기록은 424 페이스에 해당하는 3시간 5분 36초였다. 아쉬움이 남지만 후회스럽진 않았다. 여름의 무더위, 쳇바퀴 같았던 헬스장 트레드밀, 휴가지에서도 가족들 자는 새벽에 러닝화 신고 살금살금 호텔방을 나서던 일이 떠올랐다. 내년 춘마에선 서브스리를 하자고, 이왕이면 전반보다 후반을 빠르게 뛰는 ‘네거티브 스플릿’으로 달성하자고 다짐했다. 바라볼 목표가 있다는 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뛰어보니 처음엔 몰랐던 춘마 코스의 기승전결이 느껴졌다. 초반 5㎞를 지나 몸이 풀리자 의암호 풍경이 펼쳐졌다. 가을 정취를 만끽하며 달리다 보니 코스의 중점(中點)인 신매대교였다. 이곳에서 국내 최고 열기로 유명한 응원에 잠시 취한 뒤엔 거짓말 같은 정적과 함께 자신과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최대 고비인 서상대교-춘천댐을 지난 뒤에도 크고 작은 오르막은 계속됐지만, 그것 또한 지나갈 때쯤 춘천 도심에 진입해 열띤 응원을 다시 만났다. 주저앉은 주자의 다리에 파스를 뿌려주는 러닝 크루 회원들, 손바닥 모양으로 오린 골판지를 내밀고 주자들과 하이파이브하는 사람, 자동차 창문을 내리고 “파이팅”을 외쳐 주는 시민들…. 일면식도 없는 이들에게서 이런 응원을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며 결승선을 통과할 때 신기하게도 페이스가 올라갔다.
부상을 걱정할 만한 통증이 없다는 데 안도하며 대회를 마무리했다. 춘천역에서 서울 가는 오후 2시 4분 열차를 탔을 때 창밖 멀리 아직도 뛰는 주자들이 보였다. 첫 출발 총성이 울린 오전 9시부터 다섯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긴 시간 달려온 마라토너들에게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마라톤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본지 채민기 기자가 3시간 5분 36초로 춘천마라톤 풀코스 42.195㎞를 완주한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마라톤이라는 삶의 태도
달리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30대 후반이었던 2018년 연말쯤이었다. 운동을 해야겠는데, 언제든 짬이 나면 나가서 할 수 있는 게 달리기였다. 첫날 호기롭게 나섰다가 1㎞도 못 달리고 숨이 차서 멈춰야 했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달리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개운했다. ‘하루 뛰고 하루 쉬기’를 의도적으로 실천한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에 작심삼일하는 바람에 초심자의 과욕이 부상으로 이어지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달리기는 피드백이 확실한 운동이라는 점도 꾸준히 하는 데 도움이 됐다. 요즘은 전문 선수가 아니어도 전체·구간별 페이스, 거리, 소요 시간, 심박수, 케이던스(단위 시간당 걸음 수) 같은 데이터를 GPS(위성항법시스템) 시계로 쉽게 얻을 수 있다. 이 숫자들이 실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발판이 됐다.
가령 중간에 쉬지 않고는 도저히 뛸 수 없었던 10㎞가 언젠가부터 가볍게 느껴졌다. 1㎞당 페이스를 5분대에서 4분대로 올려도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게 됐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그렇게 보내고, 다시 열리기 시작한 하프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이제는 마라톤의 매력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으로 풀코스 완주 후기를 쓰고 있다. 기자 초년 시절 춘마 취재팀에 파견돼 참가자들을 인터뷰하면서도 내가 42.195㎞를 뛰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는데, 세상일은 알 수 없다.
한때 ‘아저씨들의 운동’이었던 러닝이 ‘힙’한 취미가 됐다. 달리기를 소재로 방송 예능이 나오고 소셜미디어 콘텐츠도 많아졌다. 아마추어의 마라톤은 대개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사투처럼 묘사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부상 없이 즐기면서 뛸 수도 있다. 다만 그러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완주를 위해선 무엇보다도 35㎞ 안팎의 장거리 훈련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 거리를 뛰려면 몸이 받쳐줘야 하고, 그 몸은 마일리지로 만들어진다. 결국 마라톤 완주는 평소의 꾸준한 훈련을 전제로 한다. 아무나 할 수 없지만 누구나 할 수 있다.
올해 춘마를 앞두고 3주간 술과 커피를 끊었다. 몸이 가뿐해지는 듯한 느낌이 기대 이상이어서 앞으로도 알코올·카페인과 거리를 두려고 한다. 키빼몸(키 빼기 몸무게)을 110 정도로 유지하고, 보강을 위한 근력 운동도 틈틈이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라톤은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풀코스를 뛰고 나서 아팠던 다리는 이틀쯤 지나자 평소처럼 회복됐다. 이제 내년 봄 서울하프마라톤까지 이어지는 겨울 시즌의 시작이다. ‘가을의 전설’이 남긴 여운을 뒤로하고 다시 달릴 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