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남 해안에서 150㎞ 떨어진 곳에 있는 그란모르구 프로젝트 시설. 그란모르구는 수리남에서 프랑스의 에너지기업 토탈에너지가 운영하는 심해 석유 프로젝트다. 토탈에너지 누리집 갈무리
“‘그란모르구’(새로운 새벽)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새로운 기회가 될 겁니다.”
지난 6월 남미 북동부 수리남의 수도 파라마리보. 찬 산토키 대통령은 ‘수리남 에너지·석유·가스 정상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시는 번영의 기대감으로 들끓었다. 2028
년부터 생산하게 될 14조원어치 원유 덕이다. 5회째를 맞는 이 회의엔 수백명의 업계 인사와 정치인들이 참석했다. 대표적인 ‘탄소흡수국’ 중 하나인 수리남은 앞으로 자국 해역에서 매일 25만배럴의 원유를 생산한다. 서울시 운전자(2024년 640만명) 3분의 2가 하루에 쓰는 양으로, 석유 시추와 개발은 프랑스의 토탈에너지, 미국의 아파치(APA) 같은 기
업이 주도한다. 수리남 정부는 이 수익을 담보로 국채를 발행했는데, 이 국채 펀드의 이름이 ‘새로운 새벽’이다.
기후위기 문제를 보도하는 미국의 독립매체 그리스트(Grist)는 지난달 ‘세계에서 가장 친환경적 국가인 수리남이 석유에 미래를 거는 이유’란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매체는 수리남 사례가 “2015년 파리협정으로 출범한 ‘신기후체제’가 겪는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전했다. 탄소흡수국이 화석연료 개발에 내몰린 상황 때문이다.
수리남은 제30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0)가 열리는 브라질과 아마존 열대우림을 공유한다. 국토의 93%를 덮은 이 거대한 정글 덕에 수리남은 부탄, 파나마과
함께 ‘탄소흡수국’으로 불린다. 기후 문제에선 ‘탄소흡수국’이라 칭송받지만, 수리남은 지난해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우리나라의 6분의 1 수준인 5870달러(840만원)에 그치는 이른바 ‘저개발국’이다.
수리남은 코로나 팬데믹 이전 부채의 늪에 빠져 있었다. 과도한 전기요금 보조금과 주요 수출품인 금 등 원자재 가격 하락 때문이었다.
수리남은 민간 채권단에 5억달러(약 7100억원), 중국에 5억달러, 개도국 지원국 모임인 파리클럽에 8800만달러의 빚을 지고 있었다. 수리남 정부는 2020년 이 국가부채에 대해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했고, 국제통화기금(IMF)이 개입해 정부 지출을 제한했다. 이어 통화 가치가 폭락하고 물가상승률이 세 자리까지 올라갔다. 월급과 저축이 사실상 휴짓조각이 되면서 기본적인 식료품, 의약품을 구하기도 힘들어졌다. 와중에 2021년 토탈에너지가 수리남 해역에서 석유 매장지를 발견한 것이다.
수리남의 열대우림과 강변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2023년 수리남 정부는 민간 채권단과 부채를 재조정했다. 지난해엔 석유 수입 일부를 ‘국부펀드’로 돌리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석유 시추를 통해 나오는 수입을 거대한 저금통에 쌓아 지속가능한 성장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으로 수리남은 불과 몇 년 만엔 국가부채 문제를 해결한 놀라운 반전을 맞았다. 토탈에너지의 성공에 고무돼 미국의 셰브런과 영국의 셸, 말레이시아의 페트로나스 등이 수리남 해역에 뛰어들었다. 석유는 수리남에게 미래의 약속, 그야말로 ‘새로운 새벽’이었다.
하지만 이는 전세계에 또 다른 위협이 됐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화석연료 감축과 퇴출이 시급한 상황에서 몇 안 되는 탄소흡수국이 화석연료 개발에 나섰기 때문이다. 수리남 해역에서 생산하는 연간 8천만배럴의 석유는, 모두 연소하면 3천만톤 이상의 온실가스가 발생한다. 수리남 열대우림이 흡수하는 양의 수십 배에 달한다. 게다가 수리남은 석유뿐 아니라 ‘탄소크레딧’도 판다. 수리남은 산림을 지키는 ‘산림 전용과 황폐화 방지’(REDD+) 활동을 국제감축실적으로 인정받아 지난해 150만톤의 탄소크레딧을 발급받았는데, 기업들이 이를 사들이면 더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할 수 있다. 토탈에너지는 수리남의 탄소크레딧 5천만달러어치를 매입하겠다고 밝혔고, 일본과 싱가포르 등도 탄소크레딧에 관심을 보였다.
수리남의 사례는 파리협정의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파리협정은 ‘공동의, 그러나 차이가 나는 책임과 각자의 역량’ 원칙을 명시한다. 역사적으로 탄소를 배출해 부유해진 선진국들이 기후위기 대응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선진국들은 그간 온실가스 ‘감축’에도, 개발도상국에게 ‘기후 재원’을 제공하는 데에도 부족했다. 2020년 녹색기후기금(GCF)이 수리남의 열대우림 보존에 대한 기금 5300만달러를 승인했으나, 이는 특정 프로젝트에 묶인 장기 투자금일 뿐이었다. 마르시아노 다사이 전 수리남 환경부 장관은 그리스트에 “기후 금융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제30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0) 개막을 앞둔 지난 5일(현지시각)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이 지난 7월 취임한 수리남의 제니퍼 길링스-시몬스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영국의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은 “2022년 선진국들의 실제 기후 관련 순지원금은 280억~350억달러(40조~50조원)로 공식 발표 액수의 33%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선진국들이 조성했다는 기후 재원의 약 70%가 ‘대출’ 형태로 제공된다는 점, 대부분 ‘감축’을 위해 쓰일 뿐 ‘적응’을 위한 재원은 적다는 점 등이 주된 문제로 꼽혔다. 윤세종 플랜1.5 활동가(변호사)는 “선진국들은 대가 없는 ‘지원’이 아니라 대가가 있는 ‘국제감축’(국외에서 온실가스를 줄인 실적을 자국 감축량으로 인정받는 제도)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이들에게 진정한 책임을 물릴 수 있어야 파리협정 체제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 짚었다.
김규남 기자 3strings@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