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신스틸러'(scene stealer)란 어떤 배우가 출연 분량과 관계없이 주연을 뛰어넘는 큰 개성과 매력을 선보여 작품에 집중하게 하는 인물 혹은 캐릭터를 이르는 말입니다. 단어 그대로 등장만으로도 시선을 강탈한다는 뜻입니다. 연합뉴스 K컬처팀은 연극으로 연기를 시작한 배우 중 드라마, 영화 등의 매체로 영역을 확대해 '신스틸러'로 활약하는 배우의 릴레이 인터뷰 콘텐츠를 연재합니다.]
(서울=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배우 서이숙(57)은 스스로를 '발표를 좋아하던 소녀'였다고 돌아봤다. 국어 시간을 기다렸다가 책 읽기 자원하던 아이, 학급 회의만 열리면 '저요, 바다이야기디시 저요'를 외치던 아이. 그때부터 이미 '목적어가 분명한 화술'이 몸에 배어 있었다고 했다.
'화술 빼고는 특별할 게 없는 사람'이라고 겸손하게 말하면서도 그는 "좋은 배우는 관객과 시청자를 설득하는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자신을 향한 엄격함과 동료를 향한 존중, 연극이 열어준 독서의 세계, 그리고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한' 말랑말랑한 마음 무료릴게임 까지.
연극평론가 김수미, 후배 배우 박현서와 함께 서이숙의 화술론, 버티는 힘, 그리고 '좋은 배우'에 대한 정의를 들어봤다.
◇ "발표 좋아하던 소녀…화술의 핵심은 '목적어'"
-- 어릴 때부터 지금의 '화술'의 기원이 있었던 것 같다. 처음부터 말을 잘하는 편이었나.
▲ 나는 발표 게임몰 를 좋아했던 소녀였다. 학교에서 국어 시간이 그렇게 좋았다. 남 앞에서 책 읽는 걸 좋아했고, 학급 회의만 하면 꼭 "저요!" 하고 손을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부터 '저요저요 병'이 있었던 거다.(웃음) 흐지부지 말하는 걸 정말 싫어했다. 내가 뭘 모르면 답답하고, 말할 때는 분명하게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전달력이 좋다', '화술이 바다이야기슬롯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나는 화술의 핵심이 '목적어'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슨 말을, 누구에게, 왜 하는지 목적어가 정확하면 말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배우들에겐 이성과 감성이 둘 다 있잖나. 감성에만 빠진 친구들은 말을 자기한테 하듯이 하고, 조금 이성적으로 보는 친구들은 말을 '밖으로' 던진다. 나는 후자인 것 같다.
-- 신천지릴게임 (박현서 배우) 선배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몸이 같이 움직여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상대를 움직이게 만드는 '말'이다.
▲ 나는 항상 눈을 보고 이야기한다. 긴장한 후배가 있으면 눈으로 에너지를 보낸다. 그 에너지를 받는 친구와 못 받는 친구가 있다. 에너지를 받아서 같이 올라오는 친구들이 결국 잘 된다. 말이 정보 전달뿐이 아니라, 에너지를 주고받는 행위라는 걸 느끼게 된다.
-- 긴 무명 시절을 버틸 수 있던 힘은 무엇이었나.
▲ 배우는 단시간에 결과를 보는 직업이 아니다. 선생님들이 늘 "배우는 10년이 지나야 발이 무대에 닿는다"고 하셨다.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나는 그냥 '그래, 10년을 목표로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목표를 딱 정하니까 좀 편해졌다. 물론 속으론 이런 생각도 했다. '내가 쟤보다 잘하는 것 같은데', '나도 저만큼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나한테는 아직 기회가 안 오지?' 그런데 나는 확신이 있다. 이건 배우뿐 아니라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다. 10년을 정말 꾸준히 했는데 아무것도 안 온다는 건 있을 수 없다.
-- 정말 그렇게 믿는가.
▲ 그렇다.(웃음) 그렇게라도 스스로 최면을 걸어야 버틸 수 있다. '안 오면 어떡해요'라는 생각하면 못 버틴다. 대신 조건이 있다. 가만히 있으면 기회는 절대 안 온다.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 공연도 많이 봤다. 보러 다니는 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많이 보다 보면 눈이 뜨인다. 공연 보고, 책 보고, 연습하고. 그렇게 10년을 버텼다. 그런데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무명이더라. 그래도 무대 위에서 늘 이렇게 생각했다. 무대의 중심은 나야. 코러스를 해도 관객이 나만 보는 것 같은 기분으로 했다. 어느 날 공연 끝나고 한 관객이 내게 와서 사인을 부탁하더라. "주연 배우님은 저쪽에 계시는데요"라고 했는데, 그분이 "아니요, 저는 선생님 사인이 받고 싶어요"라고 했다. 그때 깨달았다. '아, 배우는 주인공만 있는 게 아니구나. 나를 보고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구나.' 그걸 알게 되니까 너무 재미있어졌다. 남이 보든 말든, 나는 내가 주인공이라는 마음으로 감정을 몰입하는 것. 그 생각으로 버티다 보니, 아직도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다.
◇ "최고 아니면 싫다…그래도 '최고'는 죽을 때쯤 알 것"
-- 욕심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내면의 욕심도 꽤 클 것 같다.
▲ 욕심이 없겠나. (웃음) 나도 남 잘되는 거 보면 배 아프다. 그게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욕심 없어요" 하는 게 오히려 더 힘들지 않나. 다만 애초에 내가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화술 빼고는 특별할 게 없었다. 예쁘지도 않았고, 시골에서 막 올라와서 세련된 구석도 없었다. 그래서 기준을 하나 정했다. 나는 최고 아니면 싫다. 최고가 될 때까지 가보자. 그 기준에 맞추다 보니 늘 자신에게 엄격했다. 어떤 자리를 못 가면, '내가 아직 부족하구나. 저 자리를 가고 싶으면 더 가야 한다'고 다독였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한 번도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위치'에 가본 적이 없는 거다. 최근에야 깨달았다. '아, 내가 죽을 때쯤 알겠구나. 그때가 최고였고 최선이었구나.' 지금은 그냥 그때까지 계속 가보는 수밖에 없다.
-- 스스로를 지키는 힘이 참 단단해 보인다. 부모님, 책, 주변 사람들 가운데 어디서 왔다고 보나.
▲ 세 가지가 다 있다. 부모님은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힘을 주셨다. 연극을 하면서는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 시골에 그대로 있었다면 셰익스피어, 체호프를 평생 읽어볼 기회가 있었을까. 연극을 하면서 작품을 맡으면, 그 작가의 책을 죄다 섭렵했다.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를 공연할 땐 그분 책을 다 읽었다. 그게 너무 재미있었다. 연극이 준 가장 큰 선물은 '공부의 길을 터준 것' 같다. 그런 것들이 내가 버텨낼 수 있는 힘이 됐다. 요즘 다시 책을 붙잡은 이유도 같다. 나이가 드니까 문해력이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대본 이해력도 예전 같지 않다. 단어가 잘 생각이 안 난다. 그래서 '다시 읽어야겠다' 싶어 읽고 있는 책이 '쓰는 인간'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기록 얘기가 나오는데, 천재도 "이러다가 아무것도 끝내지 못하겠네"라고 쓴다더라. 그런 걸 보면 우리도 다시 써야겠다, 읽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든다.
◇ "말랑말랑함을 유지해야…꼰대가 되지 않으려는 노력"
-- (박현서 배우) 배우로서 '이것만은 꼭 지키고 싶다'는 원칙이 있는지. 내 경우에는 '말랑말랑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 사고가 굳지 않도록 풍경도 보고 책도 읽고, 세상이 아름답다는 걸 계속 상기하려고 한다.
▲ 너무 좋다.(웃음) 나도 말랑말랑함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꼰대가 안 되려고 정말 노력한다. 나이를 먹으면 어쩔 수 없이 고집이 생긴다. 싫은 것도 많아진다. 그걸 조금 유연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자꾸 스스로 질문한다. "네가 이걸 해서, 아니면 안 해서, 너한테 얼마만큼 손해야?"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이다. 큰 손해가 아니라면 그냥 조금 손해 보고 사는 게 낫다. 그렇게 마음을 풀어주려 한다.
-- 본인의 연기를 모니터링하는 편인가.
▲ 못한다. 아직도 내 연기를 제대로 못 본다. 연극이 좋은 이유가 있다. 그날 밤에 다 소멸한다. 나도 무대에서 최선을 다해 불태우면 끝이다. 기억하는 건 관객뿐이다. "그날 공연 정말 좋았어요"라고 말해주는 사람들. 그걸로 족하다. 드라마나 영화는 다르다. 작품이 끝난 뒤에도 자료가 남는다. 그게 걸린다. 내 연기를 보면 너무 부끄럽다. 배우는 기본적으로 나르시시즘이 있는 직업이라고들 하지 않나. 자기 걸 보고, 좋아해야 하는데, 나는 그게 잘 안된다.
-- 과거의 연기가 부끄럽다는 건, 그만큼 지금의 자신이 성장했다는 뜻 아닐까.
▲ 명언이다.(웃음)
-- 어느 시점에서 '내 연기가 달라지고 있구나'라고 느꼈던 순간이 있었나.
▲ 나는 연기를 '자기감정을 해소하는 도구'로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기적인 배우와 이타적인 배우를 굳이 나누자면, 이기적인 배우는 자기감정에만 깊이 빠져든다. 이타적인 배우는 자신에게 깊이 빠져들면서도 동시에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 작가의 메시지를 함께 붙들고 간다. 내 성향이 조금 더 이성적이고, 이타적인 쪽이라고 본다. 그래서 항상 상대 배우를 많이 본다. 상대를 인간으로서 존중하는 마음이 크다. 배우는 결국 '사람 이야기를 하는 직업'이니까. TV 매체에 가보니, 그게 더 상세하게 느껴졌다. 연극은 무대 위에서 긴 호흡의 에너지를 끌고 가야 하지만, 드라마는 한순간에 딱 집중해 에너지를 주고받는다. 이 '순간 집중'도 훈련이 필요하더라. 예전에는 풀샷에서 에너지를 다 쏟아내고, 버스트 샷에서 같은 감정을 유지하는 게 힘들었다. 현장 경험이 쌓이면서 전체 흐름을 읽고, 어느 지점에서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써야 하는지 조금씩 알게 됐다.
-- 본인이 생각하는 좋은 배우란.
▲ '연기로 설득 잘하는 사람'이다. 이병헌 배우를 보면 늘 나를 설득한다. 김혜자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그분들 연기를 보고 있으면 "그래, 저게 진짜구나" 하고 마음이 따라간다. 나도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
-- 앞으로의 계획은.
▲ 드라마도 계속하고 있고, '호텔 델루나' 속편이라고 소문났던 넷플릭스 시리즈에도 참여했다. 영혼들을 위로하는 '그랜드 갤럭시 호텔' 이라는 드라마다. 그렇지만 나는 태생이 연극이라, 연극은 그냥 좋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설명하기 힘들게 좋은 것들이 많다. 곧 다시 무대에 설 예정이다.
-- 어떤 배우로 남고 싶나.
▲ 그런 걸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다만, 죽을 때쯤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 그래도 배우로서 행복했구나. 괜찮았네."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이미 귀하다. 여기서 뭘 더 바라겠나. 지금처럼 감각 잃지 않고, 후배 배우들과 현장에서 서로 에너지를 주고받으면서 연기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 개인적으로는 이미 충분히 설득되고 있다.(웃음)
▲ 그렇다면 더 노력하겠다.
<기획·제작총괄 : 김희선, 구성 : 민지애, 진행 : 김수미·박현서, 촬영 : 박소라, 웹기획 : 박주하, 스튜디오 연출 : 박소라, 연출 : 김현주> seva@yna.co.kr
▶제보는 카톡 okjebo 기자 admin@119sh.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