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이 지난달 28일 산불로 전소 피해를 입은 경상북도 청송군 소재 국가민속문화유산 ‘사남고택’ 현장을 확인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달 영남권을 휩쓸며 사망자 31명의 인명 피해 기록을 남긴 최악의 ‘괴물 산불’로 인해 국가 유산들도 속수무책으로 타버렸다.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지난달 21일 시작된 산불이 꺼질 때까지 열흘간 총 33건의 국가유산 피해가 발생했다. 12건의 문화재는 아예 전소됐다. 경북을 대표하는 의성군 소재 천년고찰 고운사의 ‘연수전’과 ‘가운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무너져 내렸고, 국가지정 민족문화유산인 청송군 소재 ‘사남고택’도 소실돼 기와만 덩그러니 남았다.
목조 건축물에다 산불 진화 작업이투자가
어려운 산림에 위치한 우리나라 국가유산이 상당수여서 이번 화재로 취약한 문화재 관리 실태가 재조명되고 있다. 29일 한국일보가 매년 시행되는 국가유산 소방 점검을 분석한 결과, '소화기 불량’이 매년 지적되는 단골 문제로 확인됐다. 국가유산 보호에 소방의 기본인 수동소방시설조차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LG디스플레이분석
국가유산 소방점검... '소화기 문제' 단골 지적
국가유산청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 소속 임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최근 4년(2021~2024년)간 국가유산 소방점검 결과 및 조치내역'과 ‘5년간 전국 국가유산 화재 발생 현황 및 원인’ 자료에 따르면, 개선 조치 권고가 내려진 문화유산 총 138개 중 절반이 넘는 70건(알덱스 주식
50.7%)이 소화기 문제였다. ‘안전핀 없음(탈락)’ ‘감지기 고장(미작동)’ ‘노후’ 등 설비 개선을 주문하는 권고가 대부분이었다. ‘점검 누락’이나 ‘잡초 제거 필요’ 같은 기본적인 관리 부실을 지적한 사례도 잇따랐다.



시각물_최근 4년간 경북도 국가유산 소방점검 사온라인 릴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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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산불 피해 지역인 경북 안동, 청송, 영덕, 영양의 국가유산 관리 실상도 엇비슷했다. 경북 4곳의 소방점검 결과 9건 중 8건이 소화기 문제로 주의를 받았다. 산불이 지근거리까지 번져 소실될 뻔했으나 소방당국이 '긴급구조통제단'을 설치하며 사수한 안동 봉정사와 하회마을 양진당에는 각각 ‘주황금성릴
변 소화기 분산 배치 필요’, ‘부엌에 소화기 비치 필요’ 지적을 받았다. 청송 후송당 고택에선 ‘주기적 소화기 점검 요망’ 등이 개선 필요 사항으로 적혔다.
소화기 문제 지적 건수는 매년 크게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2021년 9건에서 2022년 19건으로 두 배 이상 급증했고 2023년 20건, 2024년 22건으로 늘었다. 소화기나 방수총 같은 수동소화시설은 화재 초기 진압에 유용하지만 관리를 제대로 못하면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국가유산방재학회장인 백민호 강원대 소방방재학부 교수는 "소화기에도 수명이 있어 그대로 두면 내부 분말이 가라앉을 수 있다"며 "평소 자주 써줘야 하고 주기적 점검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소화기는 33제곱미터(㎡)당 한 대씩 두도록 관계 법령에 규정돼 있지만 화재에 취약한 우리나라 국가유산에는 훨씬 더 많은 소화기를 비치해야 한다고도 했다.
소화기 같은 수동소방시설 관리 부실뿐만 아니라 화재 대응에 유용한 다른 소방 설비들도 관리 부실 지적 사항이 수두룩했다. 화재 발생 시 △소방당국에 자동으로 신고가 되는 자동화재속보기의 통신선 불량 △불꽃감지기 미작동 △연기감지기 미작동 등 58건이 지적됐다.



시각물_최근 4년간 국가유산 소방점검 결과 중 ‘소화기 문제’ 현황



예상 못 할 대형 화재... "이제라도 철저히 대비해야"
단기간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영남권 산불로 국가유산 33건이 부분 소실되거나 전소된 것으로 집계됐다. 직전 5년간 2023년 강릉 산불로 인한 경포대 수목과 편의시설 부분 소실 1건이던 국가유산의 산불 피해 규모가 급격히 커진 것이다. 백민호 교수는 "기후변화 등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위기 상황을 고려한 대응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할 때"라며 "국가유산별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접근도 반드시 고민할 지점"이라 강조했다.
국가유산청은 문화재 소방안전 점검에 나섰다. 이달 14일부터 두 달간 전국 국가유산 567곳에 집중 안전점검을 하고 소방 설비와 방범 설비의 작동 상태를 점검한다. 전기·가스 시설, 여름 풍수해 대비 시설 안전상태 등을 살핀다. 재난 대응 안내서가 현장에 마련됐는지도 확인한다.
다만, 기본 방재 시설 구축과 점검만으로는 예기치 못한 대형 화재 대응에 역부족이란 지적도 나온다. 임오경 민주당 의원은 "국회와 학계, 현장 전문가들이 목조 문화재의 화재 위험을 우려해왔음에도 화재 대비에 소홀했다”며 "국가유산청이 종합적인 재해 대비책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유산에는 무인 소방 설비가 마련돼야 이미 타버린 뒤 수습에 그치는 '사후약방문식' 소화 활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제언도 잇따른다. 김동현 전주대 소방안전공학과 교수는 "불이 나고 난 다음에 물 뿌리면 꺼지지도 않을뿐더러 이미 다 재가 된다"며 "인력으로 넓은 범위의 불을 다 막을 수 없지만 무인 설비로 문화재 권역에 미리 물을 뿌려두면 불이 쉽사리 옮겨붙지 않는다"고 말했다.
문지수 기자 door@hankookilbo.com허유정 기자 yjheo@hankookilbo.com강지수 기자 soo@hankookilbo.com